프롤로그: 간호사로 살아가는 내가 발견한 삶의 지혜와 온기
박완서 작가님의 문장은 늘 삶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옵니다. 거창한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조용히 흔들어놓는 힘이 있지요.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랬습니다. 과연 진실이란 꼭 크고 웅장해야만 의미가 있을까요? 박완서 작가님의 글은 오히려 아주 작고, 때로는 모래알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순간들 속에서 인간의 진심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저는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읽는 동안, 저자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서 나의 이야기인 양 저 자신을 투영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작가님이 40대부터 70대까지 써 내려간 수많은 에세이 중 보석 같은 글 35편을 엮은 책입니다. 작가님이 삶에 대한 진솔한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솔직하고 담백한 성찰을 담아낸 에세이들이죠. 저는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책장을 덮고 한참 동안, 작가님의 그 진심이 따스한 온기처럼 오래도록 제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1. 박완서 문학 속에서 발견한 나의 '모래알만 한 진실'
박완서 작가님의 문장은 늘 그렇습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파고들어, 오래된 기억의 문을 건드립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속의 글들은 겉보기에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결처럼 스며 있고,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제 삶의 장면들과 맞닿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과거의 저와 마주했습니다. 특히 다음 세 편의 글이 제 삶 깊숙이 파고들어 큰 울림을 주었답니다.
2. 첫 번째 모래알: '나는 누구일까', 청춘의 상실과 나를 마주하는 용기
<나는 누구일까>라는 글에서는 특히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가님이 남영역에서 지갑을 잃어버리고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어 난감해했던 그 장면… 교통카드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서울 남영역에 처음 간 작가님이 지인이 차로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약속이 어긋나 만나지 못하고, 결국 집에 가려 하는데 지갑이 없는 걸 알고 당황해했던 에피소드.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거리에서 혼자 헤매던 작가님이 느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상실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때 내가 남영역에서 잃은 건 지갑도, 길도 아니라, 명함만 한 주민증이나 카드에 불과한 나 자신이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의 청춘 한 조각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처음 서울에 갔을 때였습니다. 낯선 공기, 쏟아지는 사람들, 휘황찬란한 간판들 속에서 저는 유난히 작게 느껴졌습니다. 그때의 저는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감당할 줄 몰랐지요. 버스 노선 하나 외우는 것도 벅찼고, 길을 묻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은 단순히 낯선 도시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이 큰 세상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할까’… 그런 질문들이 제 마음속에서 낯선 소음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남영역에서의 상실'은 곧 제 청춘의 상실과 닮아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갑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내 자리,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내 이름 같은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영역의 박완서 작가님처럼, 저 또한 그때 잃어버린 것은 단지 길이 아니라 ‘자신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미숙하고 작았던 저를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 미숙함이 있었기에 제 안에 조금씩 단단한 무언가가 쌓여갔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이 박완서 작가님이 말씀하신 “모래알만 한 진실”의 의미가 아닐까요?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도 제 안에 남아 있는 한 조각의 진심 말입니다.
3. 두 번째 모래알: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부모로서의 자식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라는 글에서는 박완서 작가님의 교육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마음 한 편이 저릿해졌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이 자녀에게 바랐던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제 자신에게 조용히 되물었습니다. '나는 아이 셋을 어떻게 사랑해왔던가?' 공부 잘하는 아이,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아이로 키우려 애쓰며, 정작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었습니다.
저는 아이 셋을 키우며, 작가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무게’를 오랫동안 느껴왔습니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저는 늘 무언가를 강요했습니다.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급함,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 아이를 맞추려 했던 저의 욕심.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부담이었음을, 저는 이 글을 통해 마주했습니다.
“사랑이란 아이의 삶을 가볍게 해주는 것”
작가님의 이 문장이 제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저의 사랑은 때로 아이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반성은 또 다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말씀처럼, 부모의 사랑이 무거워질 때 아이는 자주 그 무게에 짓눌립니다. 저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이의 성적표보다 아이의 웃음이 더 중요한 것임을,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보다 잘 견디는 사람이 더 단단하다는 것을.
저는 이제 아이들에게 “열심히 해라” 대신 “괜찮다”를, “해야지” 대신 “어떻게 하고 싶니?”를 묻는 엄마가 되려 합니다. 그 변화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진실의 조각입니다.
4. 세 번째 모래알: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그리고 간호사로서의 재탄생
그리고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이라는 에세이에서는 오래전의 현실이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작가님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딸에게 “여자도 전문적인 공부를 해서 평생 일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여 서울로 유학 가서 신여성으로 공부했던 작가님. 그럼에도 결혼과 출산으로 결국 일을 놓아야 했던 세대의 슬픔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여자도 전문화된 공부를 해서 평생 일을 가질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한 덕에 전문직을 가진 작가님의 딸. 그러나 그 딸이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이 임박하자 어쩔 수 없이 사직을 해야 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님 본인도 일이 있으니 본인 일을 희생하느냐 마느냐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던 상황에서 던진 고백은 참으로 씁쓸하면서도 현실적이었습니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서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느낌은 매우 맥 빠지고 낭패스러운 것이었다.”
저 역시 그 문장을 읽으며 멈춰 섰습니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어렵게 첫 직장을 얻었지만, 첫 아이를 임신하며 그 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친정엄마는 고향에서 장사를 하셨고,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나는 애는 절대 못 봐준다”고 못을 박으셨었죠. 결국 저는 경력과 꿈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저와 아이, 단둘이서 하루하루를 견디며 독박 육아에 몸도 마음도 힘겨워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매일 후회했습니다. 일도, 꿈도, 제 자신도 잃어버린 것 같았죠. 그리고 둘째, 셋째가 생기면서 흐르는 시간 속에 ‘나의 꿈’과 ‘나 자신’은 한없이 더 작아져만 갔습니다. 그 시절엔 세상 누구보다도 ‘뒤처진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언제나 조금의 위로를 남깁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다 자라고, 저 또한 다시 저를 찾고 싶어졌습니다. 간호대에 입학한 것은 그때의 결심이었습니다. “한 번쯤은 나를 위해 살아보자.” 늦깎이로 다시 시작한 간호 공부는 쉽지 않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시절보다 더 간절했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간호사로 일하는 저는 비로소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기여하고 싶은지를 압니다. 병실 한 켠에서 환자분의 손을 잡고 있을 때, 저는 종종 '모래알만 한 진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통증 앞에서 필요한 것은 완벽한 처방이나 화려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의 불안을 함께 견디는 마음, 그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이 직업을 통해 배우고 있는, 작지만 가장 진실한 가치입니다.
5. '모래알만 한 진실'을 품고 살아가는 오늘의 나 💖
박완서 작가님의 문장은 저에게 삶의 한 장면을 다시 비춰주는 거울 같습니다. 작가님은 거창한 행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작고 사소한 진실들을 모래알처럼 손바닥 위에 고이 올려놓습니다.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삶의 결을 이루고, 그 결이 곧 한 사람의 인생이 됩니다.
'나는 누구일까'에서 길을 잃던 어린 날의 저,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에서 아이를 위해 자신을 잃어가던 엄마인 저,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의 이야기 속에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흔들리던 저.
그 모든 순간을 지나 지금의 저는 간호사로, 한 여성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삶은 진실을 깨닫는 일의 연속이며, 그 진실은 늘 작고 단단한 모래알의 형태로 다가온다는 것을요.
박완서 작가님의 글은 저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걷는 그 길 위에서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꼭 품고 가렴.”
오늘도 저는 병원에서, 그리고 제 삶에서 그 진실을 품고 살아갑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도,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해도, 진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만은 단단히 쥐고 말이죠. 그것이 박완서 작가님이 제게 남긴 문학의 온기이자, 간호사로서의 저를 지탱해주는 또 하나의 모래알 같은 진실입니다.
P.S.이 글은 병원내 가을 독후감 공모전에 응모하여 1등 수상의 기쁨을 제게 안겨준 글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 올립니다. 이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저의 진심이 독자 여러분께 닿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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